
깊어 가는 가을 저녁이 나를 묵은 사진첩을 들추게 했다.
그곳에는 내 기억에는 없는 젊은 청년의 내 아버지가
추레한 일본 군복을 입고 무표정하게 바라 보고 있다.
소화 19년,
1944년 막바지 징용에 징집되어 떠나기 전에 남기고 가셨던 사진 한 장.
기념될 만한 일은 아니었겠지만...
다행히 나고야에서 탈출 밀항선을 타고 돌아 왔다는 얘기를 어린 날에 들은 기억이 있다.

제2 국민역이라고...
일본 징용에서도 살아 돌아 왔고
아마도 6.25 무렵에 다시 징집되어 군에 가지 않았나 싶은데
이 때의 무용담(?)도 간간히 들었던 기억이 있기는 하다
무엇을 기원하며 목에 묵주를 걸고 사진을 찍었을까...?
아직도 아버지는 청년이다.

전설처럼(?) 얘기 속에만 있는 내 오라버니다.
얼마나 귀한 자손이었는지 그 시절에 색동한복에 돌사진이라니...
다섯 살이 되던 해 정월 그믐 날에 짧은 생을 마감하여 온가족이 애통해 했고
나흘 뒤 이월 초 나흗날 태어난 나는 그 애통함에 묻혀 절대로 환영받지는 못했으리라...
나중에 들은 얘기로 그 때의 어머니 기도는
눈 앞에서 아픈 자식과 복중의 아이를 놓고
둘 중에 어느 하나를 데려 가려면 제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데려가라고...
그렇게 기도했던 그 때를 엄마는 내게 미안해 하셨지만 나라도 그랬을 것 같고
또 나는 모르는 일이었으니 그러실 이유 없다 말씀 드린 적이 있다

국민학교 3학년 아홉 살.
아버지와 서울 남산 공원에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 가서 찍은 사진.
저 체크무늬 원피스는 고모가 만들어 입혀 주신 것이고...
아마도 어린 딸을 서울 구경을 시켜 주신 것 같은데 내 기억에는
저 곳에서
케이블카의 그 신기함과 생애 최초로 콜라를 마신 그 일 밖에 생각이 안난다 ㅎ




그래도 이 정도는 온전히 내 기억 속의 부모님 모습이다
60년대 초반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 여행을 하는 일은
지금으로치면 어디 유럽을 다녀 오는 일보다 귀한 경험이었을 터,
비행기를 배경으로 그야말로 기념 사진을 찍을 만했겠다 싶다.
그래도 두 분은 춘.추로 관광으로 여행을 다녔고 여름에는 물놀이 (해수욕장)도 다닌
그야말로 신식으로 사셨던 분들이다.
어렸을 때 속리산이며 설악산 등등에서 사 온 기념 사진첩을 보기도 하고
그곳 특산물을 사다 동네에 선물을 돌릴 때 심부름 다녔던 기억도 있고
속리산 팔상전이 양각된 빤짝이던 스테인리스 필통도 생각이 난다.
이미 오래 전 돌아 가신 분들이 아직도 내 기억과 사진첩에 살아 계시니
이렇게 깊어 가는 가을 밤 느닺없이 소환된 이분들 조금 당황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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